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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그를 거꾸로 읽는다"_자고세 220413에 대한 기록
    공부 기록 2022. 4. 14. 15:12

    '자고세'(자본주의 고민 세미나)에서는 지난주부터 『체 게바라 혁명가의 삶 1』(존 리 앤더슨 지음, 허진·안성열 옮김, 열린책들, 2015. 구판은 『체 게바라, 혁명적 인간』, 플래닛, 2010)을 읽기 시작했다. 자꾸 이론서로만 치달으려는 나를 김윤우 선생이 점잖게 타이르며, 그런 어려운 거 말고 혁명을 실천했던 사람의 전기도 한번 읽어 보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마침 나는 체에 대한 오랜 관심으로 구판을 가지고 있긴 했으나 너무 두꺼운 탓에 완독하지는 못하였으므로 그러자고 합의하였다. 한 주에 100쪽 정도씩 읽기로 했으니, 두 달 반이면 완독할 수 있을 듯하다. 그다음엔 얼른 다시 이론서로.... 흥미로운(?) 사실은 구판의 출판사 대표이기도 했던 옮긴이 안성열 씨가 신판 내 이력에서는 열린책들의 인문주간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것. 검색해 보니 플래닛 출간 종수가 제법 되는 것 같던데, 왕성히 활동하던 출판사 대표가 대형(?) 출판사에서 일하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아무튼, 어제 우리가 이야기 나누었던 부분은 2~5장으로 에르네스토의 소년-청년 시절에 대한 내용이었다. 아무래도 전기를 읽는 재미 중 하나일 텐데 우리가 알던 (극히 일부의) 체와는 다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치 활동에 철저히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종종 급진적으로 보이는 호언을 내뱉었다든지(105쪽. 이하 모두 구판 기준), 몸을 잘 씻지 않고 옷도 잘 빨지 않아 '찬초'(돼지)로도 불렸다든지(114쪽), 실험을 위해 발암 물질을 친구에게 먹였다든지(144~145쪽), '보통 사람'의 옹호자라기엔 다소 실망스러운 흑인 비하 발언을 했다든지(194쪽) 등등. 그래서, 우리는 이것들을 체에 대한 모종의 판단의 근거로 삼아야 할까? 글쎄, 섣부르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많은 (약간은 치기 어린) 메모들에서 혁명에의 투신과 이른 죽음을 벌써부터 읽어 내려 하지는 말자. 사건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으므로, 그것들은 조건으로 성립될 수 없다. 에르네스토는 체가 되어 죽었고, 우리는 자꾸 죽은 체를 통해 에르네스토까지 읽으려 한다. 대부분의 오해와 착각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체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 그리고 각각의 시선이 뒤섞이고(비동시성의 동시성?), 한 인물의 신화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최대한 에르네스토부터, 에르네스토만 읽어 보자, 어렵겠지만, 물론.

    그의 여행에 대해서는 특기해 두도록 하자. 5장 "북으로의 탈출"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로 널리 알려진 남미대륙 횡단 여행, 그 시작에 대한 내용이다. 영화화도 여러 번 될 만큼 드라마틱한 여행. 사람들은 혁명가 체의 씨앗을 거기서 발견하려 하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분명 그 여행에서 에르네스토가 알베르토와 겪었던 일들, 만났던 사람들은 체를 형성하는 데 많은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멋진가, 민중 속으로(브나로드?). 에르네스토는 대륙을 통과(痛過)하며 체가 되었을 것이다(만일 여행하지 않았다면 체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은 가능할까?). 이를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왜 나는 자꾸 머뭇거리는가, 판단을 유보하려 애쓰는가?

    여행의 목적, 바로 그것 때문. 에르네스토는 여행 중 만난 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여행을 왜 하냐, 무엇을 경험하기 위해 사서 고생을 하느냐'라는 말을 듣고 민중의 삶을 더욱 들여다보기로 결심했다는데, 그 방편이 꼭 게릴라가 되는 것이었을까, 어째서 알베르토처럼 의사가 되지 않았을까, 반대로 알베르토는 왜 혁명가가 되지 않고 의사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 '선택'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선택'인가. 이 전기의 끝을 나는 대강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알고 싶은 건 한 사람의 결정적인 한 시점, 수많은 미결정의 조건들로 들끓는 그 찰나의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바랄 것인가? 바라야만 하는가? 바랄 수나 있는가? 여행이 아닌 고행을 일삼던 나는 언제 이런 낙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해 여름 땅끝으로 방향을 잡았을 때,
    딱히 무엇을 바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3주간의 여정 속에서 숱하게 만났던 단 하나의 질문, 그렇게 걸으면 뭐가 남느냐는 그 질문에 아주 단순 명쾌하게 답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나는 늘 속수무책이었고, 종종 카페 주인을 작가로 만든 어떤 여행과 의사를 혁명가로 만든 어떤 여행을 떠올리고는 했다.

    11년이 흘러 늙고 낡은 마음을 두 바퀴에 싣고 동쪽 바다로 방향을 잡았을 때,
    나는 오히려 무엇인가를 애타게 바라며 이렇게 적었다.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희망을 희망하지도 않고, 절망에 절망하지도 않기를. 허나 이 또한 무망함을, 내가 모르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여전히 나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바라지 않는지,
    어떻게 해야 옳은지를 도무지 모른다.
    다만 아는 건, 이 모름을 모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가 있다면, 이제 나의 목표는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지속이라는 사실이다.

    다다르지 못하거나 지나치는 것은 나의 소관이 아니다.


    도대체 무엇을 바랄 수나 있는 세상인가? 나뿐 아니라 다들, 어쩌면 핍박보다 무서운 탈력감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작금의 여행은 비즈니스 아니면 이코노미로 양분되는 계급의 구별 짓기(퍼스트클래스는 언감생심), 또는 힐링을 참칭하며 시스템을 스스로 고착화시키는 행위일 뿐이다. 여기 어디 기존의 자신을 완전히 파괴해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려는 시도가 보이는가? 없다, 없어. 북으로, 북으로 탈출하려던 체 게바라도 지금 한국에 '청춘'으로 살았더라면, 남으로, 남으로 스펙이나 쌓으러 떠나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 비겁하고 웃기지도 않은 상상, 이제 좀 그만하고 싶다.

    자 어쨌든, 그는 마침내 미국에 있었다(196쪽). 그는 어떻게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6장 제목)라고 선언할 수 있었나. 다음 세미나는 6장에서 10장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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