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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말할 수 있을까, 읽(들)었다고_자고세 220805&0814에 대한 기록
    공부 기록 2022. 8. 16. 19:47

    『스피박의 대담(가야트리 스피박 지음, 새러 하라쉼 편집, 이경순 옮김, 갈무리, 2006)을 한 주에 한 장씩 읽고 있다. 역시나 쉽지 않지만, 천천히 가 보려 한다. 기록도 이렇게라도, 몰아서라도, 발제문만 올려서라도, 어떻게든 이어 가 보려 한다. 그러다 보면 뭐가 돼도 되겠지.

     

    지난함 속에서, 3장은 그나마(자의적으로나마) 몇 가지는 건진 것 같다. 오래전 어디선가, 해체론과 동양철학(특히, 노장 사상과 불교)의 상관관계에 대해 들었던 것도 어렴풋이 떠올랐고. 가령, 무한 퇴행, 즉 이론적 형태를 최종적으로 근거 지으려고 하는 일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문제를 철저히 고찰하면서 본질 문제를 검증해 가는 것”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을, “인간이란 지금 존재하는 곳에서 시작해야만 한다”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연상시키지 않는가? 이것은 관련 문헌들을 좀 찾아볼 필요가 있겠다. 연계란 늘 어느 정도 위험한 것이지만, 위험을 늘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다음 세미나는 4장과, 여력이 된다면 「세 여성의 텍스트와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8월 24일(수) 저녁에.

     


    [발제문]

    발제자: 지다율

     

    2. 포스트모던 상황: 정치의 종언?

     

    포스트모던 시대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근대주의의 거대 내러티브에 대한 신념을 상실했다는 것(료타르). 그런데도 우리는 정치적 진보를 상상해야 할까? 그렇다면 합리주의와의 관련이나 신념을 어느 정도 요구할 것인지?

     

    해체론 운동은 거대 내러티브에 대한 선전 포고인가, 아니면 승리의 축제인가?

    스피박: 그것은 힘없는(“약함의p.79에서, 던의 표현, 의 번역) 급진적 수용. 거대 내러티브에는 목적이 있는데, 후기구조주의자들은 하나의 내러티브가 구축될 때 뭔가가 뒤에 남는다는 것을 연이어 상상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무엇이 남는가?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내러티브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해체론자들이 좌절하지 않고 그렇게(?) 하는 데는 어떤 권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선 우리를 설득해야 한다. 설득력 있는 표준적인 방법의 하나는, 논의를 사용하는 것, 이성에 호소하는 것, 증거에 호소하는 것, 사물을 지적하는 것. 그렇지만 그들이 산출하고 있는 논의의 최종 지점은 부재(absence)이다. 그들의 논의를 논의로 해석해야 할까?

    스피박: 그것은 의식의 변용, 변용하는 정신구조와 같은 것을 요구한다. 이데올로기적 기획. 모든 실천의 매우 친근한 문제를 우리에게 들이대어 근사한 해결을 하고, 그것 이외의 모든 것이 제거되도록 하는 하나의 분석을 산출하는 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고려하는 실천을 산출하는 것.

    대명사들이 너무 많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내부에서 사회 정의에 대해 말하고 싶다면 사회 정의를 위해 말하기 위한 어더한 기반이 그 내부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맑스주의에서는 그것이 인식형태 자체에 들어가 있으며, 맑스주의의 입장과 얽혀 있어서 피억압자 계급과 연대하고 있다. 그것은 최초의 대단히 명료한 인식론적, 정치적 선택. 우리들은 어떻게 그러한 선택을 하는 걸까?

    스피박: 인간은 낡은 규칙에 따라 선택한다. 이 규칙 이외에는 없다(데리다).

     

    정치에 있어 항상 중요한 점은, 지금 문제의 초점이 무엇인가, 이제부터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 여기에 인과관계라는 것이 포함. 우리들이 정치에 대해 판단을 시작할 때 인과관계로 생각하는 이외의 방법은 없다.

    스피박: 우리들은 인과관계로 생각하는 것을 중지할 수 없다. 그렇지만 후기구조주의 언어로 소개하자면 메타렙시스(니체), 즉 하나의 수사를 또 하나의 수식으로 치환하는 방식이 있다. (원인이 결과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원인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 인과론적 사고에는 그 자체의 한계가 있다는 것. 후기구조주의자라면 일반적으로 원인은 결과의 결과로 산출된다고 말할 것.

    자연과학의 근대철학자들까지도 내러티브의 최종 객관적 분석이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는다. 당신(스피박)은 어떤 특정 인간의 인식 기획도 타당성이 없는 결론으로 끝내는 한에 있어서만 진리라고 한다.

    스피박: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인간의 인식 기획이 아니라 모종의 제도적 강제의 내부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 확실한 인식의 즐거움은 불가능이 아니라 가능성을 가져다준다는 점. 설령 불가능하다 해도 물러설 정도의 불가능은 아니다.


    발제자: 김윤우

     

    3장. 전략, 정체성, 글쓰기

     

    발화는 글쓰기(비자연발생적인 것, 죽어버린 것으로 격화된)의 구조에 따라 구조화된다. 살아 있는 현재의 발화는 우리 앞에 ‘현재’가 있었고 우리 뒤에 ‘현재’가 다가온다는 것을 이해시킨다. 글쓰기는 일종의 일반화된 폭력 제도를 가져온다. 다만 글쓰기의 폭력에 환원될 수 없는 폭력 구조가 존재한다. 이 두 개의 폭력 구조와 이론적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는 일관된 교섭이 있다(데리다). 대담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가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준다. 나를 ‘타자화’하는 멋진 방법. 나는 자신을 대담에 내맡겨 버린다.

     

    우리는 언어나 장소에 딱 들어맞는 단순한 정체성 개념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중심적인 것은 없다. 중심은 항상 그 자신의 주변성의 관점에서 구성된다. 해체론의 예 가운데 그 어떤 것도 해체론 담론과는 어긋난다.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은 회의하는 주체이다. 남성에 의해 산출되고 정의된 여성 담론에 대한 비판. 회의하는 주체의 입장을 “되찾는 일”에 종사하려는 여성들은 오늘날 도시에서 매우 특권적인 입장에 있는 것 같다. 인간은 특정한 맥락에서, 회의하는 주체의 입장을 되찾는 투쟁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세계의 보다 넓은 여성 지지자들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러한 넓은 맥락에서 내가 실제로 배운 것은 자기의 특권을 상실로 여기고 버리는 것이다.

     

    해체론의 중요성은 전략적인 배제에 대한 관심이다(전략적인 배제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무한 퇴행, 즉 이론적 형태를 최종적으로 근거 지으려고 하는 일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문제를 철저히 고찰하면서 본질 문제를 검증해 가는 것. 단절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제 우리의 본질적인 일 주변에는 무한 퇴행이 있다는 것을 돌연 인식하는 것. “인간이란 지금 존재하는 곳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나는 이론에 의한 실천의, 실천에 의한 이론의, 급진적 단절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단절이기 때문에, 나는 속단할 수 없다(?).

    “해체론의 기획은 항상 일정한 방법으로, 그 자체 작업의 희생물이 되어 있다.” 지금까지 이론적 생산의 최대 문제는 그것이 옳다고 하는 감각이었다. 해체론은 자각하고 있음을 의문시하는 종류의 사고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유희할 수 없다. 자기 의식적으로 자유롭게 유희하기 시작하면 말하기가 철학을 적절하게 대표/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매우 결정론적인 잘못을 다시 저지르게 된다. “해체론이란 잘못을 폭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항상 진리를 낳을 의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경계하는 것이다.”

    특정한 맥락에 상관없이 규범화하는 것을 비판한다.


    발제자: 지다율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각주:1]

     

    불가피한 우회로를 따라 이 논문은 주체를 문제화하는 최근 서구의 노력들을 비판하는 것에서 제3세계 주체가 서구 담론 안에서 재현(represent)되는 방식을 문제 삼은 것으로 나아갈 것이라 밝힌다. 그 길을 따라가면서 사실 맑스와 데리다 양자가 주체의 좀 더 근본적인 탈중심화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제안할 기회를 가질 것이라고.

     

    들뢰즈랑 푸코를 문제적이라며 까는 거 같은데, 뭔 말 하는지 잘 모르겠다.[각주:2]

     

     

    엮은이 로절린드 C. 모리스의 서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은 동명의 학술 대회(2002)에서 시작되었다. 로절린드는 이 학술 대회도 기획했나 본데,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가 발표된 이후 이에 관한 여러 논쟁과 담론이 이 에세이에 지고 있는 빚을 의식하면서 서로 수렴하기를 바랐다고. 그 기획은 향수와는 거리가 멀었고, 스피박의 에세이가 여전히 지니고 있는 급진성이나 적절성을 다시 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서구 학계의 페미니스트들이 범하기 쉬운 제3세계 여성에 관한 잘못된 과잉 동일시에서 시작한다는 맥락에서가 아니라, 서구 대학과 인도 및 남아시아 서발턴 연구에서 진행된 급진 담론 비판 속에 젠더와 성차의 문제들을 타협하지 않고 집요하게 도입하는 스피박 작업의 충분한 의미를 다시 한 번 파악하려 한다는 맥락에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 담겨 있는 사유의 혁명성을 부주의하게 증언하는 글들. 가령, 어떤 러시아 번역본 제목은 하급 장교[각주:3]는 말할 수 있는가?로 되어 있기도. 스피박이 말하듯, “여성이중으로 그림자 속에있을 수밖에 없는가.

     

    스피박이 처음으로 서발터니티에 관해 글을 쓸 당시, 질 들뢰즈와 미셸 푸코 같은 서구 작가들은 서구 주체/주체(라고 가정된 것)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을 생산하고자 애쓰고 있었다. 스피박의 읽기는 이 작가들을 엄밀하게 심문하면서 시작. 들뢰즈와 푸코의 주장에서 이론의 주체가 은밀히 재강화되는 것을 간파. 스피박에 따르면 이론의 주체의 재강화는 한편으로 서구 위치의 비보편성(nonuniversality), 다른 한편으로 언어의 주체문법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갖는다는 의미에서도로서의 주체 형성에서 젠더의 구성적 장소를 인식하지 못한 들뢰즈와 푸코의 이중적 무능력 때문이다(??). 여기서 서발터니티의 논의가 시작된다.... 그의 텍스트는 서구 이론에 관한 자신의 이전 담론(지배 텍스트의 짜임새를 파악하면서 읽는 가운데 내부로부터 비판을 수행하라는 해체주의 명령에 의해 형성되는 담론)과 결별한다.

     

    (틈틈이 배우기 위해 잊는다라는 태도를 자주 환기시킨다.)

     

    서발터니티는 하나의 정체성이라기보다 우리가 하나의 곤경이라고 부름직한 것이지만, 이는 가장 기이한 의미에서 진실이다. 왜냐하면 스피박의 정의상 서발터니티는 권력에 접근하는 능력을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구조화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서발터니티의 말 없음을 모면하는 정도에 따라 그녀는 서발턴 되기를 그만둔다. 스피박은 이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또 누가 여기에 동의하지 않겠는가? 피억압자의 위치에는 진정성도 미덕도 없다. 거기에는 단순히 억압이 있다. 스피박의 에세이는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자체의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질문에 당연히 수반되는 우리가 어떻게 들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근본적으로 열린 채 남아 있는 질문을 스피박에게 배운다.

     

     

    옮긴이 태혜숙의 해제

     

    스피박은 어떠한 이론도 정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의 글에서는 총체적 분석의 발판이 부재한 가운데 서로 모순되는 이론들이 경합하고 협상하면서 형성되는, 잠정적이고 열린 분석틀이 사용된다(??). 그 분석틀은 언제라도 수정되고 확장될 수 있어서 그녀의 사상은 유보적이고 비정형적이며, 거칠고 마무리되지 않은 채,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한다. 그러한 특이성을 갖는 스피박의 사상은 해체주의, 맑스주의, 포스트식민주의, 문화론, 페미니즘의 이론 지형들과 집요하고 비판적으로 협상하는 가운데 구축되어 왔다. ‘해체주의적·맑스주의적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을 스피박 사상의 이론적 지향은, 부지불식간에 국제 노동 분업과 공모하는 지시인의 권력/지식에 대한 비판, 안의 바깥, 말하기, 말 걸기, 배움을 위해 잊기(unlearning), 서발턴 등의 개념화 작업으로 구체화된다. 그 개념들이 오해받기도 했지만,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오늘날 전 지구적 자본주의 가부장 체제를 인식하고 그 변화를 꾀하는 실마리로서 그 개념들의 유효성이 인정받고 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는 앞에서 언급된 핵심 개념들의 단초를 일찍이 제시했다.

     

     


        [각주]

    1. 1)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는 Lawrence Grossberg and Cary Nelson eds., Marxism and the Interpretation of Culture, Urbana: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Basingstoke: Macmillan, 1988에 처음 수록되었고, 태혜숙이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세계사상』 4호, 1998에 번역·수록했다. 스피박은 이 글을 수정해 Gayatri Chakravorty Spivak, A Critique of Postcolonial Reason: Toward a History of the Vanishing Present,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Chap. 3의 일부로 재수록했고, 태혜숙은 이 책을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공역, 갈무리, 2005)로 번역했다.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스피박 외 지음, 태혜숙 옮김, 2013, 그린비)는 두 판본을 모두 수록하고 있으며, 1999년의 수정본이 1부(『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3장 후반부 섹션이었던 글과는 3장 초반부에서 다루어진 시르무르의 라니 굴라리(??)에 대한 언급과 몇몇 각주를 수정한 것을 제외하면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에, 1988년의 원본이 부록으로 들어 있다. 고민하다가, 초판본(부터? 만?) 읽기로 했다. [본문으로]
    2. 2) 그럴 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자.... 이를테면, 로절린드의 서문.... [본문으로]
    3. 3) ‘subaltern’은 군대에서 하급 장교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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