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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영을 위하여』를 위하여 또는 김서연들을 위하여
    출판 기록 2022. 4. 19. 11:32

    여기서도 고백했지만, 나는 편집자 같은 게 되고 싶은 적이 없다. 저자에는 관심 있었으나 워낙 무능하고 게을러서 그저 그런 간서치로 남을 게 빤했다. 그러다 꼭 10년 전 한 책을 읽었고, 책의 내용보다 표지에 있는 한 이름이 뇌리에 꽂혔다. 바로, 김서연.

     


    김서연은 이 책의 편집자인데, 저자와 함께 표지에 이름을 올려 제법 화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황인찬, "편집자 이름, 저자와 나란히출판계 편집자 예우논란", 〈동아일보〉, 2012.05.10. 참고). 오랫동안 '익명' 또는 '그림자'로 지냈던 편집자가 전면에 드러난 '최초의 사례'라는 게 그 이유.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 자신 편집자 출신이기도 한 장은수 당시 민음사 대표는 “편집자는 저자의 그림자 속에 있을 때 오히려 빛날 수 있습니다”라고 아름답게 포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상황은 바뀐 것 같다. '편집자의 말'을 싣는 책들도 늘고 있고(김슬기, "책, 편집자 목소리도 싣는다", 〈매일경제〉, 2019.03.17. 참고), 유유출판사의 편집자 공부책 시리즈처럼 아예 편집자가 쓴 책들도 늘고 있다. 무척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편집자들, 아니 출판노동자들의 이름은 그늘 속에 있다. 나는 이 부당함을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깨달았고, 편않 활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확인하는 중이다. 표지는커녕 판권면에도 없는 이름, 그것은 그들의 몫이 정당히 치러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입하려는 욕망과 지우려는 욕망의 오랜 경합에서 우리는 늘 패배했다. 이제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아도 좋지 않을까?

    때로, 이름은 존재 그 자체이다. 이름이 자리한 곳이 존재의 터이다. 그곳에 시공이 모두 얽히고설켜 있다. 거기 욕망과 좌절이 있고 또 노동과 몫이 있다. 이름 몇 자를 적는 일이 쉬워 보여도 실상은 어렵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꼭 해야 하는 이유다. 과거를 현재에 기입함으로써 미래를 도모하는 것, 그러니까 저자뿐 아니라 편집자와 디자이너, 그리고 마케터의 이름과 작업들을 드러냄으로써 더 많은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 편않에서라도 시도해 보면 어떨까? 물론 아직은 내 생각일 뿐.

    끝으로 강신주와 김서연의 말을 들어 보자. 먼저 강신주, 그는 편집자 김서연에 대해, 그리고 편집자 이름을 표지에 올린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열 번의 강의가 끝나면서 김수영에 대한 나의 책은 그 윤곽을 갖추었다. 사실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다. 아니면 누구든 김수영에게 거리를 두었을 때에만, 김수영에 대한 글을 쓸 수 있다고 말해도 좋다. 이 글을 통해 나는 김수영의 빛과 그림자를 모두 담으려고 했으니, 이번 책은 김수영에게 바쳐진 조사(弔辭)나 묘지명(墓誌銘)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아버지를 잃어 외로운 내가 이제 김수영도 떠나보내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외로운 나의 조문 행위를 도와주면서 항상 곁을 지켜 주었던 고마운 사람이 하나 있다. 이 책의 편집자 김서연(金書延)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매주 강의 때마다 강의를 그대로 녹취하고 그것을 말끔하게 정리하여 내게 주었다. 상주(喪主)가 지칠 때마다 따뜻한 미소로 위로를 아끼지 않았고, 가끔 강의 도중 코피라도 나면 나보다 더 안타까워한 고마운 사람이다. 또한 거친 원고를 이렇게 사랑스러운 책으로 만든 것도 전적으로 그녀의 힘이다. 표지에서부터 책 구석구석 그녀의 손을 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그녀를 통해 나는 저자가 아버지라면 편집자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책 표지에 편집자 이름을 아울러 병기한 것으로 그녀의 마음고생이나 몸고생이 조금이라도 가시려나 모르겠다.[각주:1]


    그리고 김서연, 그는 꼭 10년 전 자유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꾸며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 이 책을 만드는 동안 암흑 속에 반짝이는 빛처럼 도움을 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고정된 편견과 비폭력을 빙자한 억압, 굳은 권력·자본과 싸우는 과정이었다. 압도적 힘에 길들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랐다면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맞서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감당해야 했던 억압과 고통으로 조금은 자랐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이 타성에 억눌리지 않는 용기를 얻었으면 한다.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누구든 사람이, 사람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시인을 위하여, 사람을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각주:2]


    이제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10년 동안 무엇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이 바뀌기 어렵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돌베개에 '김서연'이라는 분이 계시던데, 그는 그 '김서연'일까, 또 다른 '김서연'일까. 글(書)이 늘어지고(延) 늘어져서, 언젠가 우리가 마주치면 좋겠다.



    [각주]

    1. 1) 강신주 지음 | 김서연 만듦, 『김수영을 위하여』, 천년의상상, 2012, 34~35쪽. [본문으로]
    2. 2) 같은 책, 40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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